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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지금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by 오우해피데이 2010. 4. 28.

월요일 아침 이프 사무실에 나왔더니 책상 위에 우편물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뜯어보니 큰 수첩 크기 만한 작은 책 하나가 나오더군요. 제목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시듯 저자는 물론 김예슬씨입니다.

무척 반가웠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주 편지를 뭘로 쓸지 아직 정하지 못한 채 골머리를 앓던 차에 ‘쓸 거리’가 생겼으니까요.(미안해요. 예슬씨.*^^*) 얼마전 이 책이 나왔다는 뉴스를 보기는 했었는데 바쁘게 지내다 보니 잊고 있었지요. ‘바쁘다’는 게 돈 버는 기계에게는 미덕일지 몰라도 사람에게는 역시 문제가 많은 상황이라는 걸 새삼 느낍니다. 출판사 이름도 ‘느린걸음’이네요.






늦게 집에 들어가 책을 펼쳤습니다. 얇은 소책자라 만만해 보였는데 결코 쉽지는 않더군요. 개인적인 얘기는 기대보다 적었고 대체로 고려대 게시판에 붙였던 대자보 내용을 좀 더 자세하고 깊이있게 서술하는 내용이자 형식이었습니다. 초간단으로 소개하자면 그녀가 말하는 ‘김예슬 선언’의 요점은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더 근원적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의무교육과 자격증 유일 잣대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이를 이끌어 가는 대학과 국가와 시장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나아가 이 억압의 삼각동맹이 공고하게 만들고 있는 비즈니스 문명, 도시 기계 문명, 자본권력의 세계체제에 대한 근원적 도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래디컬하고 자유로운 영혼, 아나키스트, 심장이 뛰는 삶에 대한 열정, 순수함과 진정성에 대한 추구.....책을 읽으면서 불쑥 불쑥 제가 느꼈던 것들입니다. 자신의 선언이 동시대 세계 문명과 체제에 대한 근원적 도전이라는 설명 앞에서는 그 담대함에 잠시 기가 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웃음이 나왔지요. 예슬씨처럼 한창 푸르른 나이에 그런 담대함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일이 또 가능할까요? 살던 집을 뛰쳐나와 나만의 아름다운 집을 짓겠다고 선언한 초심자의 열정이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것 모를수록’ 더 의미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항상 근본적인 물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난 후 지나간 제 20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주 오랜만에요.

그러고 보니 저도 그 때 가슴 속에 이글거리는 뜨거운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항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이란 구호에 가슴 뛰면서 그 뜨거운 것을 어찌할지 몰라 헤매고 앙앙불락하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겉으로는 평범한 여대생이었지만 내면에는 거센 소용돌이가 있었고 무슨 일이든 ‘저지를’ 준비도 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예슬씨와는 좀 다른 차원이긴 했지만 ‘근원’을 향한 시선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나도 뜨거운 20대가 있었는데’ 하면서 나이 든 현재의 상황에 연민을 느끼거나 새삼 각성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런 류의 진부한, 틀에 박힌 사고와 감정의 패턴입니다. 잘난 체 한다고 돌 맞을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금도 20대 때 못지 않은 삶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쌓인 삶의 경험과 지혜까지 있으니 사실 삶이 더 편안하고 그윽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요.



이왕 버린 몸(!), 잘난 체 한 번 더 하자면^^;,

간단히 말해 ‘나름대로 생각하며’ 살아온 제 삶이 성공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대체로 만족스럽다고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 삶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떻게 큰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언젠가 한번 자문해 본 적이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그럴듯한 답은 ‘항상 근본적인 물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직면할 때마다 내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우선했고 그 결과 ‘적어도 남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자평을 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합니다. 전 제가 찾은 답이 정답이라고 믿는데 제 주변의 ‘대체로 행복한 사람들’을 봐도 비슷한 결론이 내려지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운도 좋았겠지요. 삶이란 일단 악운의 눈에 띄면 본인의 의지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농담(?)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운 문제는 운에게(!).



그래서였을 겁니다.

예슬씨 책에서 뿌리까지 파고 드는 급진성을 발견했을 때 기뻤던 것은. 신뢰가 갔던 것은.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꿈꾸는 ‘삶의 대학’이 세워질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이 때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지성과 영성, 담대한 용기를 가진 김예슬씨와 그녀와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김예슬들이 앞으로 한국사회에, 이 세상 전체에 새롭고 다양한 ‘사람의 길들’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피겨 스케이트 선수로서 김연아는 좋아하지만 인생을 김연아처럼 살라면 사양하겠다. 나를 김연아로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면, 그래서 20대에 엄청난 성공과 갈채와 주체할 수 없는 돈을 주겠다고 한다면, 단호히 그와 같은 삶을 거부하겠다. 나는 이 우주에서 나만이 타고난 개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김연아 못지 않게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고 그가 성취한 것 못지 않게 스스로 해 낸 것을 기뻐할 것이고,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낸 승리자로 자긍심을 느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인생에서 저마다의 삶의 승리를 꽃피워 갈 것이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중에서